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문단 편집) === 특별방송 당시 방송국 현장 상황 ===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방송 당시 상황은 당시 [[KBS대전방송총국|대전방송국]]에서 6·27 특별방송을 내보낸 담당책임자 유병은의 회고를 옮긴 것이다.[* 청원방송박물관을 설립했으며 2009년 8월 24일에 사망했다.] 출처는 50여 년 간 방송계에 몸담았던 이장춘(전 KBS 관재국장, 한국방송인동우회 이사)이 직접 관리하는 블로그다.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http://blog.daum.net/jc21th/17780098|링크]] 참조.[* 이 블로그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방송 역사의 자료들이 남아있다.] 다만 해당 블로그 글에서는 27일 9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며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다고 증언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27일 9시 담화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 방어가 실패했음을 인정했다고 언급한다.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이 막 대전에 도착할 무렵, 당시 갓 부임한 이범구 대전 방송국장은 서울 집에 가고 없어서 당시 대전 방송국 방송과장 유병은이 사실상 방송국장 직무대리를 하고 있었다. 이 날 오후 7시 반 경 갑자기 초대형 고급승용차가 대전 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와서 유병은 방송국장 대리가 나가보니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온 헌병사령관 [[장흥(독립운동가)|장흥]] 대령이 유병은을 급히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갔다. 유병은은 무슨 일로 어디로 가느냐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장흥을 따라 어디선가 내리니 그곳은 충청남도 도지사 사택이었고 당시 [[충청남도지사|충남지사]]였던 [[이영진(정치인)|이영진]]이 현관에서 마중나와 있었다. 이후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선 채로 귓속말을 하고 있었고 잠시 뒤 이승만은 장흥에게 출입문을 잠그도록 지시했으며 장흥은 문을 잠근 뒤 권총을 손에 쥐고 유병은을 협박하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승만은 유병은이 방송국 책임자인 지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 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저녁 9시[*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불과 5시간 반 전이다!]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어 전국에 중계해 온 국민이 듣게 하라.'''[* 즉, 서울 시민들'''만'''이 방송을 들은 것이 아니다.] >'''4.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에서 녹음했다가 밤에 여러 번 재방송하라.''' >'''5. 누가 묻든 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6. 이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 이 지시를 듣고 유병은은 그 자리에서 대전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에 필요한 방송 기기를 보내도록 지시했으며 대전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밝힌 뒤 충남도지사 관사와 대전방송국과 서울 중앙방송국에 각각 방송 선로를 즉시 개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다시 시외 전화를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에 걸어 당시 담당자 왕종현에게 오늘 저녁 9시 대전에서 방송을 올려 보낼테니 [[까라면 까|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전국에 중계 방송하라고 말했다.]] 당연히 무조건 방송하라는 말을 들은 서울 방송국 측에선 이유를 여러 번 물었고 이에 한 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방송 예정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유병은은 중계방송 기기를 조심스럽게 설치하고 마이크를 대통령 전용 탁상에 설치한 뒤 마이크 시험을 끝내고 8시 4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 조정실까지 중계선로를 개통시켰지만 선로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해 필사적으로 상태를 개선시키는 등 중계방송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9시 정각 이승만은 특별 담화를 방송했다. 서울중앙방송국이 북한군에 점령당할 때까지 이승만 특별 담화가 방송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녹음 방송 틀고 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방송인으로서 사명을 가진 일부 직원들이 남아서 예정되어있던 임시 방송을 진행하여 이승만의 담화 방송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공산군 점령 직전 마지막 방송은 기사 이성실이 오전 7시 45분까지 송출한 군가 행진곡 모음이다.[* 참고로 당일 오전 2시에 [[한강대교]]가 [[한강 인도교 폭파|폭파되었고]] 오전 6시경에는 인민군이 서울의 주요 시설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방송국을 점령한 후에는 당연히 북한의 선전방송이 송출되었다.] 이성실은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 송신기 조정작업 중 불의의 감전사고로 현장에서 순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